당나라 건국 이후 국력이 크게 떨어져 인구가 감소했다. 이세민이 즉위한 지 2 년 만에 당나라 인구는 290 만 명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이세민은 수나라의 멸망을 이용해 자신을 선언하고, 어진 정치를 원하고, 청렴해야 하며, 세금을 적게 내고, 부역을 면제하고, 각 소수민족의 힘을 결집하고, 이국리민의 우대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인구의 부흥과 국력의 강성에 힘쓰고 만리장성을 건설하는 것은 국력의 발전에 불리하다.
이세민의 노력으로 당나라는 점점 강성해져서 정관의 통치를 세웠다. 당시 당나라는 세계가 공인한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시대 중 하나였다. 당나라에서는 중국 문화도 세계 정상에 올랐다. 각국은 서로 경쟁하여 당나라에 와서 동양 문명을 공부했는데, 한때 수천 개의 왕조가 축하하러 왔다. 감진동유 () 와 현석 () 이 경을 따는 것은 당시 당나라에서 결코 희한하지 않았다. 장안의 시장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온 상인들이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는 당시 장안이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기 때문에 만년의 백거이는 여전히 자신이 한평생 분투했다고 한탄하며 장안에서 자신의 집을 한 채 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리장성을 건설하는 것은 국가 간의 교류에 불리하다.
이세민은 정관의 통치를 개척했을 뿐만 아니라 당나라의 종합 국력을 고조시켰다. 당시 당나라는 천하지사, 불복하면 누구를 때리고, 돌궐을 평정하며 토곡혼을 평정하며 고창을 평정하며 직접 고구려를 징발하고 설연도를 멸망시켰다. 주변 소수민족들이 이세민을 천칸이라고 불렀고, 무력가치는 당시 세계에서 손꼽혔기 때문에 만리장성을 건설할 필요가 없었다.
당나라 개명한 군주와 개방된 민풍은 당나라를 세계 강국으로 만들고, 당나라도 위세를 부리지 않게 하고, 만리장성을 수리하지 않아도 되며, 어떤 사람이 출병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다. 따라서 이세민은 인력과 재력을 낭비하여 만리장성을 건설할 필요가 없다.